『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불완전함에 대하여』를 읽고

2026. 10. 6. 01:26·자기계발/독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불완전함에 대하여 (원제: MESSY)

팀 하포드 저 / 윤영삼 역 | 윌마 | 2026.05.08 | 5/5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불완전함에 대하여』(원제 MESSY)를 읽었다. 제목에 눈길이 가서 고른 책이다.

 

책은 아홉 개 장에 걸쳐 알고리즘, 록밴드, 사무실 배치, 통계, 미생물과 항생제, 교통 통제, 항공 사고까지 다양한 사례를 들며 무질서와 혼돈이 주는 이로움을 설명한다. 완벽하게 정리정돈한 사무실, 위험 요소를 없앤 놀이터, 업무 성과를 숫자로만 따지는 구급차 사례에서는 복잡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질서를 세우려다 오히려 창의성, 생산성, 자기효능감이 떨어진 결과를 보여 준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불완전함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질서와 완전함을 추구할까? 책을 읽으며 이런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혼돈에서 태어난 가치

책에는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낸 사례도 많이 나온다. 그중 마음에 들었던 몇 가지를 적어 본다.

 

연주할 수 없는 피아노로 400만 장 팔린 앨범 “더 쾰른 콘서트”를 즉흥 연주한 키스 재럿,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연설을 즉석에서 써 내려간 마틴 루서 킹, 직원들이 자유롭게 꾸미고 부술 수 있었던 공간 빌딩 20. 모두 상황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움직일 때 더 큰 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 준다.

 

자동화 시스템

저자는 알고리즘과 자동화 시스템에 기대다가 판단 능력을 빼앗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의사 결정을 보완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결정권까지 넘겨서는 안 된다. 알고리즘이 결정을 내리기 시작하면 사람은 더 나은 결정을 하려는 노력을 멈추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세탁기와 알고리즘의 차이점은 무엇이지?” 세탁기는 버튼만 누르면 강가에서 빨래를 하던 사람의 노동을 대신해 주고, 알고리즘도 무언가를 검색해야 하는 사람의 노동을 대신해 준다. 그래서 처음에는 둘의 차이를 잘 느끼지 못했다. 이제는 그 차이를 알 것 같다. 바로 "의사 결정"이다. 세탁기를 쓰려면 무엇을, 어떻게, 왜 돌릴지 사람이 의도를 가지고 정해야 한다.

 

반면 알고리즘은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관심을 끌 만한 것을 보여 주며 현혹한다. 관심 있어 할 유튜브 영상, 신곡, 게임을 추천해서 원래 의도와 무관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 이 점이 둘의 차이인 것 같다.

 

우리는 왜 불완전하고 왜 불완전함을 지향해야 할까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764640

 

불완전한 존재들 - 교보문고

“우리는 단지 불완전한 타협으로 만들어진 운 좋은 영장류일 뿐이다” ‘비범함’과 ‘질병’을 동시에 얻게 된 인간의 불완전성에 관한 진화인류학 강의

product.kyobobook.co.kr

 

이 책을 읽으며 텔모 피에바니의 『불완전한 존재들』이 떠올랐다. 피에바니는 인류는 공학적 완벽함이 아니라 무수한 우연과 결함, 땜질을 거치며 진화했다고 말한다. 진화란 완전해지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때그때 주변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즉흥적으로 땜질하며 살아남는 과정인 것 같다. 어느 순간 완전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여기고 진화를 멈춘다면, 그다음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멸종한다. 인간은 불완전함 속에서 태어났으니 불완전할 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나만의 근거 없는 생각도 들었다.

 

통제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

마틴 루서 킹의 즉석 연설 “I have a dream”, 키스 재럿의 “더 쾰른 콘서트”, 마일스 데이비스의 “카인드 오브 블루”는 모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태어난 가치다. 즉흥 연주를 하는 동안에는 전두엽 일부가 비활성화되면서 의식을 통제하는 기능이 억제된다고 한다.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셈이다.

 

평소 우리는 늘 머릿속을 검열한다. 기준과 규범을 존중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 애쓴다. 이런 검열에는 약간의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검열이 창조성을 으깨 버릴 수도 있다.

 

최근 이와 관련해 얻은 교훈이 있다. 나는 머릿속에서 창발하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팀이 직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문화이기도 하고 코드를 만드는 비용도 싸졌으니, 제품에 보탬이 될 만한 건 뭐든 해 보려고 아이디어를 마구마구 실험한다.

 

그런데 너무 많은 아이디어를 즉흥적으로 써먹으려다 보니, 아이디어 하나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용자가 어떤 문제를 겪는지 가설을 세우고, 이 아이디어가 어떤 영향을 줄지, 그 뒤에 어떤 지표를 볼지, 제품에서 무엇을 노리는지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는다. 주변에 데이터 기반 분석을 잘하는 팀원들이 있어서 내 단점이 더 뚜렷하게 느껴진다. 이 고민을 시니어 팀원과 나눴을 때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즉흥적인 것은 당신의 능력이에요. 누군가는 데이터 기반 사고를 하고 또 해야겠지만, 누군가는 빠르고 신속하게 반응해야죠. 모두가 같을 필요는 없어요. 괜히 데이터를 보려고 하다가 당신의 무기인 즉흥성을 놓치게 될 거예요.”

 

내 무기가 무엇인지 또렷하게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나의 경험

나에게도 상황을 통제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다. ISTJ인 나는 예전부터 노트북으로 메모를 정리하고 지식 베이스를 관리하는 걸 좋아했고, 그래서 메모 정리 툴인 Obsidian을 잘 쓰는 방법도 공부했다. 제텔카스텐, ACE 프레임워크, inbox, dataview 같은 여러 기능으로 지식 베이스를 구조화하고 정리정돈하려 했지만, 며칠만 지나면 금세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정리정돈에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생각하지 않고 프레임워크부터 세웠고, 그게 곧 피로로 이어졌다. 지금은 직접 통제하기보다 AI 에이전트를 연동해 정리정돈을 맡기고 편하게 쓰고 있다.

 

반대로 책을 읽고 나아진 경험도 있다. 2년 동안 버스로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가서 지하철로 갈아타는 경로로 다녔다. 그러다 책에서 “지하철 파업으로 평소 출근길 대신 다른 출근길을 이용했다가 더 좋은 출근길을 찾게 된 사례”를 보고, 출근 경로를 버스 한 번에 가는 길로 바꿔 보았다. 원래 알던 경로였지만 차가 막혀 오래 걸릴 것 같아서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길이었다. 막상 타 보니 막히지 않았고 배차 간격도 짧아서 목적지까지 편하게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게다가 버스는 회사 근처에 내려 주는데, 지하철역은 회사에서 멀어서 그동안 10분 넘게 걷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출퇴근 경로를 한번 바꿔 보길 추천한다. 예상하지 못한 이득을 얻을지도 모른다. 얻지 못하더라도 신선한 경험은 되지 않을까?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할 수는 없다

7장을 읽는 동안에는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가 떠올랐다. 7장의 “모든 것을 수치화, 통계화하면 어떤 수를 쓰든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게임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대목이, 『넥서스』 3장의 “예전 농경시대에는 현실을 기록하기 위해 문자를 발명했지만, 이후 문서를 잘 정리하기 위해 문서에 현실을 맞추려고 하면서 혼돈이 시작됐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모든 것을 수치화, 통계화, 문서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현실을 자로 잰 듯 문서에 담을 수는 없다.

 

우리는 무질서와 혼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완전한 혼돈, 완전한 무질서를 받아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적절히” 혼돈을 포용해야 한다.

 

나와 같은 생각,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창조성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과 편하게 시간을 보내며 쉬는 것도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고 가치 있는 것을 만들고 싶다면, 기꺼이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러 불편함 속에 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팀의 화합이 아니라 목표의 화합을 추구해야 한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몇 번이고 되돌아봤다. 익숙함에 빠져 창조성이 무뎌진 건 아닐까. 매일 만나던 사람들하고만 대화하며 늘 하던 일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매일 아침 오늘은 어떤 AI 소식이 나왔고, 프롬프트 짜는 방식이 바뀌었고, 요새는 이런 스킬과 플러그인이 유행한다더라 하며 떠드는 건 창조성이 아닌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여러 관점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독서 모임은 확실히 신선하고 재밌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불편함 속으로 몸을 던질 때가 온 것 같다. 먼저 FECONF 2026에 가서 네트워킹을 하고 와야겠다. 부디 예측할 수 없는 만남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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